비극 부른 계모 학대 … 12세 언니, 왜 반년간 입 닫았나
[중앙일보] 입력 2014.04.08 00:57 / 수정 2014.04.08 14:29
칠곡 8세 의붓딸 사망 사건
경찰에 가혹행위 신고했지만 계모 협박·강요에 거짓 자백
보육원 간 뒤 "아줌마 사형을" … 아동학대 증언시스템 구멍
‘죽고 싶다. 엄마도 없는 내 처지. 왜 태어났나. 차라리 죽을까. 사는 이유도 모르겠다. 절망. 죽음….’
대구시 남구의 한 아동양육시설에서 생활 중인 A양(12)이 낙서장(분홍색 스케치북)에 쓴 글이다. 이런 글을 쓰고, 보육시설에 온 지 일주일째 가위로 손목을 긋는 자해까지 시도했다. A양은 지난해 8월 경북 칠곡에서 계모 임모(35)씨의 발길질 등으로 인한 ‘장파열’로 끝내 숨진 B양(8)의 언니다.
친구들과 해맑게 뛰어놀아야 할 아이에게 이런 절망과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 건 누군가. ‘계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6개월 동안이나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나. 초동 수사를 잘못한 경찰과 그대로 기소한 검찰, 법원의 아동학대 사건 증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7일 나오고 있다.
경찰과 검찰은 임씨의 강요로 거짓자백한 A양의 진술을 그대로 믿고 A양을 상해치사의 주범으로, 임씨를 한 차례 때린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그러나 본지가 입수한 B양 진료 기록에 따르면 B양은 전신에 구타당한 상처가 있었다. 왼쪽 팔은 변형이 돼 있었고 왼쪽 허벅지에는 5개의 상처가, 머리에는 찍힌 상처도 있었다. 아이가 아닌 어른이 만든 상처임을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다. A양 자매에 대한 폭력은 2012년 8~9월께 시작됐다. 고모 집에 살다가 친부·계모와 함께 살기 시작한 지 3개월 된 시점이었다. 장파열로 숨지기 1년 전부터 아동학대가 지속적으로 자행됐다는 것이다.
자매 주변에선 낌새를 채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가 턱이 찢어지고 화상을 입는 등 심한 상처를 계속 입자 담임 선생님은 지난해 2월 보건복지부에 신고했다. 아동학대 의심 소견이 나왔지만 “계단에서 넘어졌다”는 임씨 해명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지난해 4월에는 A양이 “계모한테 맞았다”며 집 근처 지구대에 직접 신고했지만 아이가 부모의 협박에 말을 바꾸자 그냥 넘어갔다. 이웃·학교에 이어 7월에는 아동상담 기관인 해바라기센터가 조사 후 “형사고발하겠다”고 경고까지 했다. 그러나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미국의 경우 아동학대 의심 징후가 보이면 학교마다 배치된 전문가가 아동보호기관에 곧바로 신고한다. 학대가 확인되면 법원이 부모의 친권을 제한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부모가 부인하거나,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하면 대개 넘어간다. B양도 그렇게 다시 부모에게 돌아간 뒤 더욱 심한 매질을 당했고, 결국 한 달도 안 돼 숨졌다. 경찰 등이 현장에 출동해 즉시 격리시킬 수 있도록 한 아동학대특례법은 올 9월부터 시행된다.
재판이 시작된 10월부터 한달 넘게 A양을 친부와 계모의 영향 아래 둔 것도 문제다. 동생을 죽였다고 거짓 자백한 것도 그래서다. 임씨가 구속된 뒤에도 A양은 폭행의 공범인 친부와 같이 살아야 했다. A양 측 황수철 변호사는 “임씨 재판은 올 2월 재판부가 변경되기 전까지 공개재판으로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올 2월 초 양육시설에 살게 되면서 A양의 진술은 바뀌었다. A양은 재판부에 보낸 편지에서도 “아줌마(계모)를 사형시켜주세요”라고 썼다.
대구지검은 지난 2일 A양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하고, B양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한 혐의(상해치사)로 계모 임씨에 대해 징역 20년형을, 학대에 가담한 친부에게는 징역 7년을 구형했다고 7일 밝혔다. 시민단체와 유족들은 “계모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최종원 대구지검 1차장은 “B양이 당시 현장에서 사망하지 않고 이틀 뒤 숨져 살인의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한편 현재 양육시설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A양은 또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자주 짜증을 내고 멍하니 눈물을 흘리며 서 있다가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대구지법은 오는 11일 1심 선고 공판을 연다. 같은 날 울산 계모 사건의 선고 공판이 울산지법에서 열린다.
대구=김윤호 기자, 박민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