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소원 ㅣ 이준익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집단 무의식’ 이론을 주장했다.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집단에 축적돼 내려온 경험으로부터 자연스레 얻은 무의식을 갖고 있다. 집단의 공통의 경험이 개개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집단 무의식이 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줄 안다. 강간이 처벌 받아 마땅한 죄라는 것도 안다. 아동 성폭행에 대한 집단적 혐오와 상처도 이 사회에서 발생한 몇가지 끔찍한 실제 사건으로 형성된 무의식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2008년 12월 일명 ‘나영이 사건’으로 불리는 아동 성폭행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다. 중년 남성 조두순이 경기 안산에서 당시 8세였던 나영이(가명)를 납치ㆍ성폭행해 영구적인 신체 장애를 입힌 사건이다. 조두순은 무거운 죄질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나이와 알코올중독 등에 의한 심신 미약을 이유로 징역 12년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그의 잔인한 범죄 수법과 “형량이 무겁다”며 항소하던 뻔뻔한 태도는 국민들의 뇌리에 아동 성폭행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강하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준익 감독이 2년 6개월만에 메가폰을 잡은 영화 ‘소원’은 나영이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실화를 다룬 영화이기에 관객의 집단 무의식을 건드려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이 허구 영화에 비해 훨씬 강하다.
이준익 감독이 지금까지 제작된 여타 실제 범죄 바탕 영화들(살인의 추억, 그놈 목소리, 추격자 등)과 차별화하고자 한 점이 있다면, 범죄에 대한 분노보다는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범죄자나 범죄 사건 자체가 아닌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 무게를 뒀다. 배우 설경구와 엄지원이 성폭행 피해 아동 소원의 부모 역할을 맡아 어린 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렸다. 설경구는 1994년 이형호 군 납치ㆍ살해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그놈 목소리’에 이어 두번째로 실제 범죄 피해 아동의 아버지를 연기했다.
영화 소원은 먼저 관객의 슬픔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뒤 이들의 마음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다독인다. 범죄가 할퀴고 간 자리에 꼭 슬픔만이 남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동훈(설경구)이 취재진의 집요한 카메라 세례로부터 딸을 보호하기 위해 배변 주머니를 찬 소원을 들춰업고 병원 계단을 필사적으로 달리는 장면이나, 미희(엄지원)가 오열하다 실신해 실려나가는 장면 등은 관객의 눈물을 쏙 빼기에 충분하다. 딸 앞에서 감정 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무뚝뚝한 아버지 동훈이 소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만화 캐릭터 ‘코코몽’의 인형 탈을 쓰고 땀을 흘리며 딸의 등굣길을 따라다니는 모습은 해학적이어서 더 슬픈 역설을 보여준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후반부에 희망을 암시하는 요소를 곳곳에 심어뒀다. 아픈 소원을 위해 성금을 모으는 같은 학교 학부모들, 소원의 부모가 운영하는 문구점에 응원의 편지를 빼곡이 붙인 같은 반 친구들, 그리고 새로운 생명(소원의 동생 ‘소망’)까지 소원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든든한 지원군이다. 이준익 감독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전달됐지만, 희망을 상징하는 장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작위적인 설정을 조금 줄이고 영화에서 희망을 찾는 일은 관객에게 맡겨두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준익 감독은 23일 기자 간담회를 통해 “이 영화의 목적은 고발이 아니라, 피해자의 내일을 쫓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관객 개개인이 머릿속에 그리게 될 나영이의 ‘내일’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10월 2일 개봉. 12세 관람가. 12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