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법관이 형사 피고인의 형량을 정할 때 법정에서 재판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는 '양형(量刑) 심리제'를 일부 법원에서 시범 실시 중이라고 말했다. 검사와 변호인이 피고인에게 실형과 집행유예 가운데 어느 쪽이 적절한지, 형량을 평균적 양형 기준보다 더 높여야 할지 낮춰야 할지 등에 관해 서로 공방을 벌이게 한 뒤 법관이 형량을 결정하는 제도다. 대법원은 시범 실시 성과를 보아 전국 법원으로 확대할지를 결정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형량은 법관이 사무실에서 혼자 정해 왔다. 법정에서 하는 재판은 주로 유·무죄를 따지는 것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뿐 형량을 결정하는 별도 과정은 없었다. 형량에 관한 절차래야 재판 마지막 단계에서 검찰이 "피고인이 이러저러한 나쁜 죄를 지었으니 엄벌에 처해 달라"고 하면, 변호인이 "피고인의 이런저런 사정을 참작해 관대한 처벌을 내려달라"고 하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나라 형사 재판의 무죄율은 2% 안팎이다. 형사 재판 대부분에서 유죄냐 무죄냐보다 형량이 얼마냐가 더 큰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형량 결정 과정은 재판 과정에서 따로 다뤄지지도 않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법관이 형량을 사무실에서 혼자 정하다 보니 비슷한 범죄 사이에서도 형량이 들쭉날쭉하다든지, 형량이 국민 법 감정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다든지 하는 지적을 받아 왔다. 법관의 자의적 형량 결정은 유전무죄, 전관예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사법부 불신을 부채질하는 요인이 됐다. 형량을 결정하는 새 제도가 도입되면 형량에 대한 국민 신뢰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도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면 문제가 있다. 검사와 변호인 중심으로 공방이 벌어져 피고인의 범죄 동기, 성장 과정, 주변 환경 같은 것들만 다뤄지지 피해자나 유족 측 사정(事情)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죄 피해자나 유족이 범죄를 당한 뒤 어떤 고통을 겪었고 범죄자에게 어떤 심정을 갖고 있는지를 법정에서 직접 말할 기회는 없는 것이다. 법관이 피고인 사정에만 밝고 피해자 사정에는 어두우면 형량 결정에 피고인 사정만 지나치게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형량이 가해자 인권 보호에 치우쳐 균형을 잃을 위험이 있고 피해자들의 승복을 받아내기도 어렵다.
작년에 집에서 20대 두 딸을 살인범에게 잃은 아버지는 전국을 돌며 '범인 김홍일 사형 촉구 서명운동'을 벌여 2만500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재판부에 냈다. 그런 방법이 아니면 재판부에 분노의 심정을 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귀가하던 20대 여성을 집 앞에서 납치해 살해하고 시신을 358조각 낸 오원춘에게 법원이 1심에서 사형을 내렸다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자 유족은 "국회나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열 살 여자 어린이를 성폭행하려다 목 졸라 죽인 김점덕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어린이의 아버지는 "어떻게 저런 자에게…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고 울부짖었다. 피해자 유족이 법관 앞에서 처참한 심정을 말할 수 있었더라면 설사 범인에게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억울하고 원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헌법 제27조에는 형사 피해자가 재판 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게 돼 있다. 대법원은 피해자나 유족에게도 법정에서 형량에 관해 말할 기회를 줘 법관이 피해자의 절절한 심정을 직접 듣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