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13자리 숫자.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는 주민등록번호다. 전 국민에게 고유의 ‘주민번호’가 부여된 것은 1968년부터다. 당시 간첩 색출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주민등록번호는 13차례에 걸친 개정을 거치며 거의 완벽한 개인식별수단으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금융, 거래, 세금 등 거의 모든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다.
주민등록번호제도는 범죄 수사에서도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범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정보만 수사기관에 저장돼 있다. 범죄 경험이 없는 초범의 경우에는 그만큼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은 전 국민의 개인정보를 국가가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수사에 활용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주민등록제도는 지문을 날인하기 때문에 범죄 수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평가다.
◆ 주민번호에 담긴 다양한 개인정보
현재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제도를 통해 정부가 관리하는 개인정보는 140개 항목에 이른다. 대표적인 개인식별번호인 주민등록번호부터 시작해 세대번호, 성명, 생년월일, 성별, 혈액형, 혼인관계, 학력, 직업 등이다. 여기에 지문 날인을 통해 생체 정보까지 보유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자체로도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주민등록번호의 앞 여섯 자리 숫자는 생년월일을 의미한다. 뒤 일곱 자리 숫자는 좀 더 복잡하다. 첫 번째 숫자는 남녀 성별과 외국인 유무를 의미한다. 앞이 ‘5’인 경우는 1900년대에 태어난 외국인 남자다.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네 자리 숫자는 주민등록증을 발급한 지역을 의미한다. 앞의 두 자리가 서울, 부산, 경기 등 광역 지역을 의미하고, 뒤에 두 자리가 읍·면·동사무소를 의미한다. 마지막 두 자리 중 앞에 숫자는 해당 지역에서 출생신고를 한 당일 순번이고, 마지막 숫자는 위변조 방지를 위한 검증번호다.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생년월일과 성별, 태어난 지역을 한 번에 알 수 있는 셈이다.
다양한 개인정보가 담겨 있는 주민등록번호는 한 번 유출되면 다양한 범죄에 사용될 수 있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알면 인터넷 사이트에서 타인의 아이디를 찾을 수 있고, 비밀번호도 약간의 노력을 더하면 쉽게 파악된다. 한 인터넷업체 보안관계자는 “악성코드나 전문적인 해킹 프로그램이 없어도 주민등록번호와 이름만 알면 수작업으로도 인터넷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다”며 “이런 경우는 아무리 보안에 신경을 써도 속수무책”이라고 말했다.
◆ 주민번호 관련 법령 뒤죽박죽…민간기관에 관리 맡긴 것이 가장 큰 문제
주민등록번호가 국민들의 생활과 국가 행정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기본적인 정보가 됐지만, 정부의 주민등록번호 관리 체계는 엉성하기 그지없다. 수많은 개인정보를 담고 있는 주민등록번호를 정부가 중심이 돼서 치밀하게 관리해야 하지만 정부는 사실상 손 놓고 있는 상태다.
무엇보다 정부는 그동안 여러가지 법률을 통해 주민등록번호 사용을 명시하면서 오랫동안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관행적으로 허용했다. 금융전산망이 대표적인 예이다. 거래 은행이 달라도 은행 관계자들이 주민등록번호만 입력하면 해당 인물의 금융자산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누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금융자산을 열람했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주민등록번호 관리를 금융기관에 떠맡긴 셈이다.
주민등록제도의 폐해를 막기 위해 개정한 법도 다른 법안과 상충되며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예컨대 방통위에서 행정안전부로 이관된 정보통신망법은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과 청소년 보호법은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허용한다. 이 두 법률은 청소년 게임중독 방지를 위해 셧다운제 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게임업체들은 청소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은 거래기록 보존 수단의 하나로 주민등록번호를 저장하게 해놓고 있다.
심우민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방통위가 주민등록번호 사용 제한에 나서고 있지만 부처 간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정보보호라는 정부 정책이 부처간 칸막이로 엇박자를 보이는 것이다. 심 조사관은 “개인식별번호 활용 자체를 금지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입법체계 전반을 종합적으로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주민등록번호에 소중한 개인정보가 담겨있는만큼 정부기관이 범죄수사 등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이용하도록 하고 민간기업이 이를 영리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